연재

무제 대표의 글이 비정기적으로 올라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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저는 지금 해외에서 체류 중에 잠시 서울에 일이 있어 돌아가는 길입니다. 환승을 위해 이스탄불 공항에 내렸는데요. 저런, 전광판에 다섯 시간 연착 알림이 떠 있습니다. 라운지로 가서 멍이나 때려야겠습니다.

바나나 하나를 씹어 먹고, 물 한 병 꼴깍꼴깍 마시면서 책이나 읽고 있는데, 뒤통수에서 이상한 낌새가 느껴집니다. 어떤 익숙하면서도 고전적이고 스타일리쉬하지만 동시에 아련한 그런 느낌? 슥 돌아보니,




어떤 미국 아저씨가 고전적이고 스타일리쉬하면서도 아련한 영화 한 편을 보고 있습니다. 내 손이 나도 모르게 아저씨의 등을 노크합니다. 그리고 말합니다. (영어로)

“아저씨 지금 <전,란> 보고 있는 거야?”

“어, 이거 재밌다.”

“나 거기 나오는디.”

“푸하하. 이 새끼 거짓말이 제법이구나?”

“진짠디?”

“진짜라고?”

“진짠디!”

“그렇다면 니가 나온 장면을 찾아 보여줘봐.”

“무슨 소리야, 나 주인공이야 이 양반아.”

“왓?”

“여기 나오네.”

“조...조...지옹뤼어?”1)

“어 나 종려임.”



바아로 셀카 박아버림.jpg



그리고 자연스럽게 난 떠나야겠다며 유유히 라운지를 나왔습니다. 그에게 이역만리 이스탄불에서 신기루 같은 추억을 만들어주고 말이죠. 아마 내 뒷모습에서 지옹뤼어의 고독을 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. 는 제법 좋은 거짓말이고, 그저 내가 가진 영어력을 다 소진한 탓에 더 이상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없어 줄행랑친 거에요. 비행기는 아직 여섯 시간이 남았습니다. 이제 진짜 갈 곳이 없습니다. 


아 괜히 말 걸어가지고.


2025년 01월 05일에 적은 글.




1) 영화 <전, 란>에서 본인이 맡은 역할 ‘이종려’의 종려를 뜻함.